2022. 12. 22. 19:37ㆍ철학의 역사
[음악 찾지 못함]
꿈은 버리고 살라한다.. 나이가 찼으니 최대한 낮춰 살아도 근근이 버티는 게 인생이란다.. 현실을 직시하며 살라한다.. 바짝 엎드리면 살만한 것이 인생이라 한다.. 이 말들은 전부 틀렸다.. 사탄의 언어다.. 꿈이 바로 존재의 힘이고, 꿈꾸지 않으면 결코 사는 게 아니다..
세계에 있었으나 미처 깨닫지 못한 철학의 영광을 위한 방송, 두 남자의 철학 수다.. 철학의 역사편.. 제 78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인문학도 메뚝씨 입니다. 오늘도 혼자 만나뵙게 되어서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똥팔씨의 이른 쾌차를 한 번 더 빌어보겠습니다.. 자, 종교개혁 두 번째 편에 들어가는데.. 지난 번에는 루터를 했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있는 종교개혁이라는 그 늬앙스가.. 사실은 반동의 기질이었다는 사실을 조금 예감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두 번째 종교개혁과 츠빙글리편을 준비해봤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럽의 16세기.. 그러니까 가장 힘들었던 분열의 시기라고 묘사된 그 16세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뜨거웠던 르네상스가 지났으니 반동이 더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르네상스 후폭풍은 대단했지요.. 유럽은 흔들었고, 오스만투르크는 세력을 훨씬 더 넓혔고, 유럽은 오랜 평화의 시대를 끝내고 오랜 결합의 시대를 끝내고 이제 분열의 시기에 도래했습니다.. 저는 모든 상승은 결합을 욕망하고, 모든 하강은 분리를 욕망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역사에서 배운 제 나름대로의 시대감각입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상승의 기운이 빠졌을 때 우리는 이별하지요.. 상승하고 싶은 욕망이 줄어들었을 때.. 우리는 결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억해야 될 또 하나의 진리적 차원의 사실은.. 이별과 분리가 새로운 것이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특히나 갈라설 때에.. 미래까지 잠기게 되지요.. 그런데 상승을 욕망할 때.. 결합을 추궁할 때.. 이 결합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뭉쳐야 하는데.. 그 뭉치는 와중에 모두가 상승의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아니지요.. 많이 아프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남은 다르고.. 어떤 결합에서도 누구나 붙어있기를 더 욕망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살겠다는 욕망과 날아오르고픈 깊은 열기를 모르는척 할 수는 없습니다.. 혼자라도 날아야 하는 것이지요.. 상승이 먼저니까요.. 다시 한 번 재차 말씀드리지만.. 모든 상승은 결합을 욕망하고.. 모든 하강은 분리를 욕망합니다.. 기어오르더라도.. 상승해야 하는 것이 이 사회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6세기 분열의 와중에서.. 미학과 과학이 분리됩니다.. 아주 예리한 대치상태에 있었는데.. 미학과 과학은.. 무용한 미학과 유용한 과학이 긴장으로 결합해서 새로운 영광을 출현시킨 것이 르네상스 시기였는데.. 미학과 과학은 서로 분리됩니다.. 만약에 이런 정치적 분쟁이 없었고, 다시 한 번 상승을 할 수 있었다면, 아름다움을 향한 파토스와 질서를 향한 로고스가 더 치열하게 서로의 고유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을 재현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르네상스를 먼 발치에서 관광상품으로만 마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쉽게도 고대인들보다 르네상스인들은 실력이 부족했고, 전수를 향한 욕망도 부족했고, 파토스적 열정과 몸의 기술도 부족했으며, 세계를 하나로 파악하고픈 로고스를 감당하기엔 그들의 로고스는 너무나도 종교적으로 기울어져 버렸습니다.. 단테가 시작한 귀족적 르네상스 정신이 이제는 추락의 길을 가버린 것이지요.. 이 길 때문에 민중적인 르네상스만이 유산으로 남아버렸습니다. 귀족적인 르네상스는 몰락했고, 그 뒤를 따라 귀족적인 과학도 은폐되었죠.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 현대인들의 기질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유의지가 의심받았다는 것입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자유의지는 노예의지.. 다시 말하면 복종의 의지.. 뒤의 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유의지가 먼저가 아니라 노예의지가 최고의 윤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에라스무스 때까지만해도 신의 의지 아래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이 루터적인 믿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지의 순수한 복종.. 이것을 우리는 순종의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 본성은 모두가 선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원죄론자들이 없었지요.. 원죄론을 반박하며 출현한 것이 르네상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수치심이 없었습니다.. 수치심을 동력으로 세운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르네상스를 빛의 시대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설명드리자면 원죄론은 수치심의 수치이고, 노예의지는 자유의지의 반댓말이며.. 이 노예의지의 강화가 종교개혁 운동의 동력이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반복하지만 1466년생 에라스무스까지만 해도 노예의지는 자유 의지 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를 비판하는 카톨릭 세력들.. 반대파들은.. 이런 말을 하지요.. 에라스무스야말로 루터와 츠빙글리가 부활시킨 알을 낳은 장본인이다.. 에라스무스는 이 말을 듣고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나는 루터와 츠빙글리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응수했지요.. 내가 낳은 것은 달걀인데, 루터는 다른 새의 알을 부화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히 달걀을 낳았는데.. 루터는 달걀에서 나오는 닭이 아니라 이상한 잡동사니 새가 되어버렸다.. 라는 고백이지요.. 이제 이 말로부터 시작되는 자유의지의 발현은 그 귀족적인 관조적 삶은 비겁한 삶.. 혹은 타락한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상승의 욕구가 모두가 다 의심받게 된 것이지요.. 뭔가를 새로운 것을 시도할려는 상승의 욕구.. 꿈꿀 자격이 추락했고.. 존재는 이제 비겁한 삶.. 순종하는 삶.. 시대의 룰에 적응하는 삶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빨리 행동하라는 요구를 받았기도 했지요.. 요컨대 이제는 오직 행동하는 삶만이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게 국가주의의 기틀.. 국가주의가 힘을 얻는 토대..라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자, 우리가 사유할 때.. 행위의 반댓말.. 사유할 때.. 사유로 상승되는 사유는 열린 보편을 지향합니다.. 지향하지요.. 사유는 세계시민적 열린 보편을 지향합니다.. 제대로 사유할 때 우리는 세계를 한 눈에 보고싶어하지요.. 그런데 반면 행위는 닫힌 전체성을 더 바랍니다.. 행위가 사유 위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모두 위에 우리끼리가 있고, 내 삶이 모두의 삶을 앞선다는 태도가 강화된다는 것이지요.. 행위가 사유 위에 위치할 때.. 감수성입니다. 내 자유.. 내 개성.. 내 소유를 높이고자 할 때, 우리는 무턱대고 행동부터 하지요.. 무턱대고 행동부터 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이 어지러운 정념을 다스려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동적 존재인데.. 인간이 짐승인 까닭이지요.. 식물은 반대로 정적 존재인데.. 식물은 움직이면 죽고, 동물은 멈춰서면 죽습니다.. 그런데 사유는 정적인 것이지요.. 본성과 다른 사유로 들어갈 때.. 고통은 상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행위하고 싶은 조급성이 생기는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행위가 정념을 채워줄(치워줄?) 때 우리는 사유를 잃어버립니다.. 사유는 애써 하는 것이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도 유사한데요.. 그.. 나를 찾는 사람들.. 그러니까 행위의 주체들.. 저는 이들이 복종과 순종의 주체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자유의지가 순종의 의지 밑에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암기부터 하려합니다.. 간혹 수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반면에 상승의 욕망.. 우리 모두의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은 사유하려 하지요.. 사유해야 그 세계가 한 눈에 열리기 때문입니다.. 내 개성, 내 자유, 내 소유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두의 힘.. 세계 전체의 이해.. 그리고 그 다음 세대.. 이것을 열망하는 그 깃발은 사유에 있지,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을 써서 정념을 다스리는데 적응하면 예민한 사유의 문자가 둔탁해질 수 있고, 그 예민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 내부의 이 종교개혁적 뉘앙스.. 이 복종의 혁명성이 우리 내부에 아주 깊이 틀어박혀 있습니다. 물론 몸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유를 놓친 몸은 맹목적이지요.. 쉽게 상승하는 욕망들이 국가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이렇게 계속 범민주(주의?)가 좁아지는 이유가.. 우리가 사유를 하는데.. 이 정적인 에너지를 쓰는데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주의가 민족주의가 되고 민족주의가 지역주의가 되며 이 지역주의가 추후에는 정체성이라는 함정에 우리를 빠트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물을 때 닫힌 나를 찾기 위해서 헤매곤 하지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의는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정의와 맞먹을만큼 무지막지한 언어입니다.. 그걸 알았다면 이 세계에 종교는 없었겠지요.. 철학 또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지칭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애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동적인 존재를 정적인 언어로 파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력한 무사유의 지경인 것이지요.. 이 정체성의 정치.. 이 정체성의 사유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연원입니다.. 루터는 자신이 독일인이기를 바랬고, 츠빙글리는 스위스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헨리8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적인 것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것에 반대된 카톨릭 세력들과 합스부르크 왕가들은 카톨릭의 전통을 무작정으로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르네상스인들이 장착하고 있었던 세계인의 감수성.. 그 정체성을 벗어날려고하는 상승의 욕망.. 이런 것은 끝나버렸지요.. 세계인의 관점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전지적 시선이 필요하지요.. 맨 꼭대기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테처럼 매의 눈으로 처마 밑에서 세계를 노려볼 수 있을 때, 사유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계인의 관점이지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 관조적 시선을.. 이 눈을 타락하고 비겁한 인식이라 매도합니다.. 저 높은 곳의 시선을 귀족적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고귀함이라는 형용사를 지워버리지요.. 위에서 보는 것은 다 귀족적이고 귀족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 세계에는 고귀함이 없다..라는 것이지요.. 귀한 존재를 믿는데.. 귀족적인 말은 싫어하는 이 이율배반의 우리의 언어센스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귀한 존재를 향한 모두의 열망을 특권층의 독점적 상승으로만 이해하는 감수성.. 이것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감수성이지요.. 먼 훗날에.. 자유의지를 향한 귀족적 자긍심은 프랑스가 부활시켰고.. 몸의 행위의 긍지를 부활시킨 것은 영국입니다.. 미학은 프랑스에서 과학은 영국에서 주도했지요.. 그런데 이 둘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자면 르네상스는 다시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20세기에 가까워졌을 때.. 조금.. 19세기 말부터 조금 이것을 붙일려고 했는데.. 이 붙이는 시도는 전쟁이라는 비용으로 도래되고 그 전쟁이라는 비용 이후에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얌전해지고 하강하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만능인.. 전인.. uomo universale 라는 전통을 계승하기.. 보기 어렵지요.. 결합이 아니라 분리이고.. 합침이 아니라 정체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개혁은 명분까지 만들어줬지요.. 종교를 가장한 정치 이득이 분열하는 이 세계를 정당화시켰습니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종교를 이용했고, 종교는 그 정치적 이득에 합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지요.. 무너져가는 기독교가 종교개혁으로 다시 한 번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죽어버린 것이지요.. 이 종교를 이용한 분열의 촉발기재가.. 종교개혁이고.. 이 종교개혁의 대표자 3인방이 루터, 츠빙글리, 칼뱅입니다.. 그 중 오늘 말씀드릴 인물은 츠빙글리지요.. 가장 급진적인 종교개혁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들어 츠빙글리가 이끈 스위스 종교개혁은 모든 전통을 금했고, 따라서 스위스 취리히의 수많은 성상이 파괴되고,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이 제거되었으며, 미사도 없어지고 찬송가도 없어지고 재단과 성유물까지 모두 사라졌고, 축일과 축서(?)와 용병제도 모든 전통적인 국가제도까지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 기본입장은 루터와 일치한다고 전해지는데.. 루터보다 과격했던 것이지요.. 루터까지만해도 그래도 순수하게 종교적인 성격.. 그래서 개인의 해방을 먼저 수립할려고 했는데.. 츠빙글리는 이제 실제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시도까지 해버립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하려면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런 명제를 성공시킨 인물이 츠빙글리이죠.. 왜 이렇게 사회적인가? 왜 이렇게 정치적인가? 이것을 알려면 우선 당시의 스위스의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인생을 다룬 뒤에 잠시 쉬었다가 스위스의 정치적 상황을 한 번 엮어보겠습니다..
자, 사유와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니체의 말을 또 담아 봤습니다.. 혼자 할려니까 시간이 많이 남네요.. 재밌습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2권 47번의 말입니다.. 무턱대고 행위할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충고인데요.. 제 아내가 찔려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근면한 사람들의 어리석음.. 이 제목이지요.. 그들은 엄청난 수고를 함으로써 한가한 시간을 얻은 다음에는.. 시간이 다 갈 때까지 시간을 소비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시작할줄 모른다.. 그러니까 사유가 없으면 존재는 깃발을 세울 수 없는 것이지요.. 방향을 잃어버린 행위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유의 정확한 이정표에 대해서 염두에 두고 행위를 할 필요가 있겠지요.. 20년 후가 상정되지 않은 오늘은 아무리 활기차다 하더라도 지워지는 오늘이 될 수 있습니다.. 자..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울리히 츠빙글리의 생을 한 번 톺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홀드리히 츠빙글리로 알려져있기도 하지요.. 마르틴 루터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루터가 1483년 11월 10일 생이고, 츠빙글리가 1484년 1월 11일 생이니까.. 두 달밖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루터와 유사한 명성을 누렸지요.. 현재는 츠빙글리라는 사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겁니다.. 아마 이 방송을 듣는 청취자분들 중에서도 처음 듣는다.. 라고 하시는 분들도 꽤 있을거라 예상합니다.. 게다가 스위스의 거물 종교개혁가 장 칼뱅.. 물론 프랑스인이기는 하지만.. 칼뱅이 종교개혁에 루터와 함께 대두되다 보니 역사적 입지가 더욱 좁아졌지요..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칼뱅은 스위스의 제네바..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3인방 중에 두 명이 나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스위스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불평등 지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비텐베르크 제네바 취리히 같은 장소의 특징은 접경지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힘을 겨루기 했던 터라.. 이 절충지는 어느 편을 드느냐에 따라 그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었던 시국이었지요.. 여기에 르네상스의 자신감있는 교황들이 출몰합니다.. 로마 교황의 힘이 상승함에 따라 권력이 3분지계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베니스라는 나라.. 아직 영광을 지키고 있던 피렌체.. 그다음 이탈리아 북방의 엄청난 맞수 밀라노.. 이런 등등의 도시 국가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이런 국가들이 서로 힘겨루기 하고 있는 전쟁의 와중이었던 터라.. 무엇보다 제대로 된 군인이 필요했는데, 그 군인을 담당했던 절정의 인간들이 바로 스위스 용병이었던 것이지요.. 스위스 용병에 대해서는 추후에 조금 더 환경과 함께 논하도록 하도록 하고.. 우선 츠빙글리의 태생부터 갑시다.. 스위스의 도겐부르크..라는 곳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비트하우스..에서 태어났는데요.. 부르크..라 함은 성을 뜻하는 독일어죠? 부르주아지..를 상상하면 외우기 쉽습니다.. 저도 베르크와 부르크가 자꾸 헷갈렸는데.. 부르크.. 부르주아지.. 성.. 요새.. 이런 뜻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자, 따라서 츠빙글리의 고향은 산 위의 높은 곳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는데, 스위스는 변방이지만 그래도 츠빙글리는 조금 사는 집안 출신이었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가정은 어느 정도 부유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스위스가 얼마나 변방이었냐? 아버지의 부는 농업으로 일어났습니다.. 스위스에서 농업으로 부를 채웠다? 어느 정도 규모인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부로도 치안 판사까지 지낼만큼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니 스위스의 당시 상황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고도 남습니다.. 스위스는 풍요로운 땅이 아닙니다.. 구글 지도를 한 번 열고 츠빙글리가 태어난 도겐부르크의 전경과 아주 가까운 거리, 지근거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바레세를 한 번 비교해보십시오.. 바레세.. 풍요의 질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스위스는 너무나 가난한 동네였고, 이 가난한 동네에서 빈부 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이들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은 사실 목숨을 건 기투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열 살이 된 츠빙글리는 1494년 바젤로 유학을 갑니다. 조금 더 큰 도시로 갔던 것이지요.. 니체가 대학생활을 했던 그 바젤입니다. 당연히 라틴어를 배웁니다. 바젤은 독일로 가는 관문이었고.. 재차 강조하지만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이 동시에 머물렀던 중립지이고,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동시에 쓸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젤에서 에라스무스도 있었지요.. 3년을 바젤에서 공부를 하는데.. 베른으로 가서 새로운 사상을 접합니다.. 라틴어가 아닌 인문주의자 헨리 뵐플린Henry Wölfflin이란 사람을 만나서 스승으로 모시지요.. 인문학을 조금 더 공부하고 싶어했는데.. 농업으로 부를 쌓은 아버지가 막습니다.. 집을 일으켜야지.. 가문을 일으켜야지 네가 하고싶은 것을 할 수는 없다.. 너는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꿈을 강요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었던 츠빙글리는 그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후원자였던 삼촌의 요구에 맞서지 못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한 길로 다시 들어갑니다.. 어디를 가야 하나? 답도 주어지죠.. 합스부르크가의 중심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갑니다.. 재밌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요.. 졸업은 못했다.. 빈에서.. 비엔나 대학에서 졸업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시 재등록 해가지고 학기를 마쳤다.. 라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츠빙글리에게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기록 같은데.. 그만큼 츠빙글리는 어디 대학에서 무엇을 할지를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의 깃발을 정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502년에 비엔나에서 공부를 계속 했는데.. 비엔나에서 졸업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비쌌고.. 더군다나 스위스 변방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중심가에서 자기가 신학자로서 자리를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공부를 그렇게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종교개혁자가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바젤 대학에 편입해서 마에스터가 되지요.. 22살에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여기에서도 인문주의자 토마스 비텐바흐를 만났는데... 이 비텐바흐라는 인문주의자는 독일 튀빙겐 대학 출신입니다.. 인문학과 신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독일 튀빙겐 대학은 헤겔, 셀링, 횔덜린으로 유명하지요.. 이때부터 명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학사, 성경학을 동시에 취득하고 바젤 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준.. 롬바르트.. 롬바르두스 명제론이죠? 문장론이 아니라? 번역이 아주 이씨.. 명제론을 강의하면서 세를 얻었는데, 이 비텐바흐에게 제대로된 공부를 수혈받습니다. 아.. 문장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사실 명제론이라는 것은 당시에 성직자들이 공의회를 할 때, 중요하게 택했던 논리학입니다.. 명제가 정확해야 공의회에서 승리할 수 있고, 승리된 공의회는 권력을 만들었기 때문에 명제를 공부하는 것은 명제의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 때 권력을 쟁취하는 일과 같았지요.. 두 번째 성직자 계급이 아니라 중간계급 에서도 변호사를 개업하려면 이 논리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증론..이라고 부릅니다.. 반복하지만 변증론은 변증법이 아닙니다. 이 변증론을 공부함으로써 그들은 계급상승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겠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와 롬바르두스를 공부한 비텐바흐는 그러나 세속적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한 목회자로 살다가 조용히 죽는데.. 츠빙글리는 그 삶의 결을.. 스승의 삶의 결을 따라서 조금 더 검소한 삶.. 경건한 삶.. 이런 삶을 추궁하기 시작하지요.. 편지도 하나 남겼습니다.. 아주 경건하고 깊은 학식을 가진 토마스..로 자신의 스승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신앙이 있는 현장에서 배설되어야 함을 나는 믿습니다. 성찬의 목적은 분명한데 주가 다시 올 때까지 주의 죽음의 열매.. 그의 은혜.. 그의 선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빵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다르게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잃은 사람에게 기쁨을 불러 일으키고, 용기를 주고..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힘과 기쁨도 주지 않고, 사람의 영혼에 도리어 해와 병을 줍니다.. 이런 편지 내용도 쓰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추후에 다룰 이 성찬에 대한 것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갈등..이기도 하고.. 성직자가 된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실시한 이유가 이 밥 먹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자, 여하튼 공부를 마친 츠빙글리는 카톨릭 사제가 됩니다.. 1506년 22살의 나이에 서품을 받는데, 글라루스 라는 곳에서 성직자로 부임하지요.. 그런데 정당한 방법으로 사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괼트리라는 성직 매매 알선업자가 있었는데.. 중계 수수료를 찔러주고 성직을 샀지요.. 매해.. 10굴덴이라는 돈.. 굴덴이라는 것은 네덜란드 화폐인데.. 얼마의 가치인지는 정확하게 저도 알 수 없습니다.. 10굴덴을 주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종교개혁 전의 츠빙글리는 절대적인 교황 지지자로 활동했는데, 교황은 그의 충성심을 높여 매년 50굴덴의 연금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50-10.. 40굴덴 남는 장사였던 셈이지요.. 이렇게 스위스의 종교는 성직을 사고 팔고, 권력을 돈으로 거래하는 그런 형편없는 부패가 만연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라루스의 스위스인들이 프랑스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조금 줬던,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의 용병으로 종군하자.. 뒷따라서 두 차례에 걸쳐서 츠빙글리도 이탈리아로 종군합니다.. 이 카를 5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을 보고 프랑수아 1세가 돈을 곱절로 줘서 나중에는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 쪽으로 많이 기우는데.. 여하튼 처음에는 카를 5세의 편을 들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이탈리아 종군은 성공했고 츠빙글리는 종신 연금을 받는데, 이 종신 연금을 허가한 인물이 그 유명한 교황 율리우스 2세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전쟁의 그 불상사를 보고는 츠빙글리는.. 자기 자신의 종신 연금을 포기해버리기도 하지요.. 자, 여기서 중요한 사항을 한 번 짚고 갑니다.. 스위스 용병이 명성을 얻게 된 이유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스위스는 왼쪽으로는 프랑스, 오른쪽으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북쪽으로는 독일에 둘러싸인 아주 작고 아담한 나라입니다.. 가난한 나라지요.. 독일은 명목상 신성 로마제국 황제만 있었는데, 사실은 실질적인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제후들이 다스리는 자치구역이 많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방 자치가 지금까지도 용이한 것입니다.. 때문에 스위스를 위협할 군사 조직은 아직 없었지요.. 그런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왕조는 스위스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군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려고 했습니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요.. 오랫동안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에 저항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잘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산악 지대의 삶을 일궜던 스위스인들의 강한 체력.. 그다음.. 전쟁에서 이겼던 그 용감한 기질.. 이것들은 스위스 용병의 명성을 만드는 데.. 충분하게 기여합니다.. 주변 열강들은 그들을 용병으로 살려고 난리가 났지요.. 여태 로마 교황청의 친위대는 스위스 용병이고, 잘 아시겠지만 프랑스 혁명 때 왕은 도망가고 모두 죽은 사람들도 스위스 용병이었습니다.. 교황 친위대는 율리우스 2세가 창설했지요.. 자.. 스위스 용병의 각 주를 칸톤이라고 부르는데.. 이 칸톤들은 독립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과 유사했지요.. 더군다나 신성 로마제국은 제국의 황제가 있었지만, 스위스 연방에는 황제조차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16세기가 들어설 때.. 이 연방에서는 인구 과잉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에는 많은 인구가 살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농업.. 먹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많은 인구..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고용의 기회가 축소되고 일자리가 없어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프랑스가 요구한다는 조건을 삼아서 당시의 스위스에 살고 있던 봉건 영주들은 용병 파견을 결정하지요.. 용병 파견으로 인구 과잉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가 늘어나니까 도시와 시골의 치안 문제가 막 일어나고 최하 계급층이 만들어낸 사회적 갈등을 용병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용병에는 엄청난 연금이 주어졌습니다.. 돈은 일년 단위로 정산됐는데, 스위스의 일년 예산.. 거의 모두를 담당할만큼.. 막강한 돈이었지요.. 왜냐하면 스위스는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으니까요.. 이럴 때..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교황은 밀라노를 접경으로 싸우기 시작하지요.. 스위스 대부분의 연방은 프랑스 편을 들었는데, 1510년에 갑자기 교황을 지지합니다.. 프랑스와 베네치아 연합군과 레오 10세가 싸우게 되지요.. 결과는 프랑스의 승리이지만.. 그 결과를 산출하는 이득은 레오 10세가 가지고 갔습니다.. 레오 10세는 루이 12세를 자신의 자식으로 외교로 성공시킴으로 인해서 전쟁에는 졌지만, 오히려 교황 권력을 강화되는 신기한 술책을 쓰기도 하는데요.. 여하튼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라는 오명을 빼고, 대단한 국지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여기에 레오 10세의 용병으로 스위스 군들이 참여하는데 프랑스와 베네치아 연합군이 너무 세서, 밀라노 남쪽에 마리그라노 라는 곳에서 격파를 당합니다.. 때문에 교황을 지지했던 스위스 연방 도시국가들은 불리한 입장이 되고, 프랑스 지지파가 정치적 우세를 다시 점하게 되죠.. 수많은 스위스 용병들이 죽었는데, 그들은 프랑스 편에서 싸우기도 하고 교황 편에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젊은이들이 외국 군대 용병으로 참전해서 하나님께서 스위스 민족에게 분노를 느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용병제도는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세 가지 큰 문제점을 이미 앓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극심한 민족주의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스위스는 자유로운 연방제도였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나라였지요.. 그런데 용병으로 참여하다 보니까 자신이 스위스인이라는 공동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이 공동의 정체성으로 싸움의 힘을.. 동기를 얻었던 스위스 사람들은 갑자기 있지도 않았던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그 민족주의는 배타성으로 돌연 변합니다.. 따라서 스위스를 강화시키는 일에 모든 것의 핵심을.. 국가와 정책 모두를 쓰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창궐하면서 스위스의 자유로운 연방제도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두 번째는 용병의 연금제도 탓에 기분은 좋고 살 만했지만 양극화가 극심하게 발생합니다. 용병에 참여했던 사람은 부자가 되고 용병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가난하니 아들들을 낳는 모든 집안은 용병에 참여하라고 다그치고.. 그런데 용병에서 돌아올 확률은 1/3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10명 중 3명이 돌아오는데 그 3명은.. 30%를 믿고 자신의 자식을 죽음의 현장에 보내야 하는.. 이런 사태가 발생되는 것이지요..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 사회는 갈등이 심화되고 해결되지 않은 열등감은 그 사회가 진취적인 면을 만드는데 비용으로 작용합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데요.. 손쉽게 번 돈으로 인해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합니다.. 쉽게 돈을 벌고, 평생 돈을 벌 수 있다는 자극 때문에 스위스의 농업은 쇠락하지요..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용병으로 참여하고 전략, 전술을 세우고 용병으로 참여할 창과 방패를 사는 데에.. 집안의 모든 살림들을 다 팔아치워야 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지요.. 츠빙글리는 이러한 문제 탓에.. 종군의 댓가로 종신 연금을 탈 자격이 있었지만 포기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래 스위스인들은 200년 동안이나 합스부르크가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용감하게 싸웠던 긍지 높은 사람들..이라고 전해집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츠빙글리는 제3의 권력인 교황청을 선택했지만.. 이 또한 스위스 사람들을 이용만 할려고 했지.. 스위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이 때.. 글라루스라는 곳에서 프랑스 군이 징병활동을 해오자.. 이에 항의하면서 글라루스를 떠나서 츠빙글리가 간 곳은 취리히 입니다.. 1518년입니다.. 취리히에 주교 자성당 주임신부가 된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취리히는 중립국의 핵심이자 취리히에는 피파가 있지요? 월드컵 시즌인데.. 그만큼 서로 갈등하는 문제의 중립지역으로 취리히를 선택했다는 것은 스위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국가마다 요구됐던 것을 무지를만큼 중립지대를 오랜 전통 속에 이어왔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 말 꼬입니다.. 갑시다.. 취리히 시절입니다.. 1516년에 츠빙글리는 지속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는데.. 사실은 자기도 돈을 주고 성직자를 산 편이라..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했습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모든 종교활동은 근본을 두려워 한다..라고 주장했지요.. 특히 마태복음을 즐겨 읽었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23장 29절 이 말을 되새김해 보면.. 그가 왜 마태복음을 읽었는지 예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언자의 무덤을 만들고.. 이를 장식할 때.. 예언자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와 같이 가르치고, 살고, 믿을 때.. 예언자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맞지요? 겉치레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이 살 때.. 이게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진리입니다.. 변함이 없는 얘기이지요.. 다만.. 츠빙글리도 아직 카톨릭 사제였고, 서른 네살인 1518년은 공식적으로 교황청 성직자가 되었고, 1520년 36살 때까지 사제직을 유지합니다.. 때문에 츠빙글리가 루터보다 먼저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오류입니다.. 특히나 결정적으로 츠빙글리가 카톨릭과 결별하게 된 사건은 종교개혁이 발생된 후에 일어나구요.. 레오 10세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츠빙글리는 아직은 카톨릭 사제 역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그러던 차에 사순절 소시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1519년, 20년.. 2년간 취리히에는 엄청난 흑사병이 퍼집니다.. 츠빙글리도 죽을 뻔하죠.. 죽음을 직접 경험한 취리히 시민들은 삶에 대해 애착합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지요.. 이 때 발생한 게 사순절 소시지 사건입니다.. 사순 시기는 경건해져야 되기 때문에 육식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취리히의 출판업자 프로샤우어의 일당들이 경건해야되는 육식의 금지 기간에 몰래 소시지를 먹었지요.. 츠빙글리도 같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재밌는 것은 츠빙글리는 소세지를 먹지 않았다고 기록돼있습니다.. 먹었다는 데에 500원 겁니다.. 여하튼 고기를 너무 먹고싶었던 것이지요.. 이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던 카톨릭 세력들에 대해 츠빙글리는 반발합니다.. 사순절의 육식 금지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준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하지요..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서 소세지 때문에 취리히 시는 카톨릭 지지파와 츠빙글리 지지파로 양분되어서 분쟁하게 됩니다.. 1523년에 열린 토론회에서 레오 10세가 1521년에 죽었으니 그의 죽음 뒤의 일입니다.. 츠빙글리는 레오 10세의 개혁정신을 믿었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하튼 1523년 1월 29일 츠빙글리는 67개 신조..를 내세우면서 성경보다 인간의 전통을 강조하는 로마 교황청 때문에 교회의 부정 부패가 발생한다고 지적합니다.. 소세지는 먹게 해달라! 하나님도 먹으라고 했다! 라는 것이겠지요..? 몇년에 걸친 분쟁 끝에 츠빙글리 쪽이 승리합니다.. 이 분쟁으로.. 츠빙글리 사건으로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촉발하지요.. 혁명처럼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사순절 때 육식할 수 있다..라는 그 자긍심으로.. 혁명가가 돼서 전사가 되었지요.. 다만 이 혁명의 유일한 내용은 전통을 박살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번 째.. 모든 교회의 성직 위계 제도가 부정됩니다.. 사제직은 없어지고 귀족 계급은 힘을 잃었지요.. 물론 취리히는 그 때 의회제도..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스위스 전체가 귀족의 힘이 없었던 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성직 위계제도의 부정은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성직자는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둘 째 교회의 성당에 성화와 성상이 모두 파괴됩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구축된 예술작품이 망실된 것이지요.. 물론 스위스는 그런 예술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제 마음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수도원까지 폐지됩니다.. 수도원을 통해 성직 계급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의 미래까지 지워지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수도원이 아무리 위선적인 청빈이고.. 아무리 정치적인 도구라 할지라도 수도사회로 들어가서 청빈한 삶을 살려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당과 절이 아무리 썩었어도.. 거기에 청빈한 스님과 신부님들..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데 이들까지도.. 다 없어졌으니.. 이제는 성과 속은 구분되기가 어려워진 것이지요.. 성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과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의 구분이 철폐되면서 사람들은 성스러운 삶을 이정표로 삼은 그런 현실적 감각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뜻은 뭐냐하면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다 지워졌다는 것이지요.. 네 번째.. 독신제도 철폐됩니다.. 저는 이게 과연 개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원래 독신제도는 카톨릭의 개혁정신 이었지요.. 성과 속이 다르지 않다면 왜 종교가 필요한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이 독신 제도 철폐에서 츠빙글리 자신은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안나 라인하르트.. 라는 과부와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실혼 관계였던 코페르니쿠스의 가정부 이름도 안나였는데.. 재밌습니다.. 이들은 사랑한 부부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엄마를 모신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 여하튼.. 사제, 독신제도의 철폐는 츠빙글리에게도 해당사항이었다는 사실.. 따라서 이게 개혁인지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동안은 미사는 카톨릭의 시대를 유지했지만.. 이제 성목요일날 했던 미사제도 까지도 폐지합니다.. 다섯 번째 개혁 현상이지요.. 츠빙글리는 1525년에 마흔 한살이 되어서 권력의 최정점에 서는데 성목요일 미사를 폐지하고 스스로 고안한 주님의 만찬의식을 시작합니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 방식의 원형이지요.. 미사하지 않고 밥 먹습니다.. 소세지를 먹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교회에 예전에, 어렸을 때, 철없을 때 다녔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 성스러운 이야기.. 숭고한 삶을 얘기하다가 밥 먹으면서 세속적인 이야기로 돌변하는 그 눈과 그 입이 참 이해가 안됐는데요..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거면 왜 예배는 드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추측해 봅니다.. 예배를 드렸으면 내 일상을 다른 말.. 다른 감수성.. 성스러운 것으로 높일 생각을 해야 되는데, 밥을 먹어버리면.. 이런 모든 것들이 다시 속화 되는 데에 기여하지요.. 소세지 먹으면 더 속화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는 소세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자, 이렇게 현대 개신교의 예배 방식의 원형을 만든 츠빙글리는 이제 달려서 모든 스위스를 나아가 모든 유럽을 이제 개신교적 종교개혁의 복판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연히 반대 세력들이 있겠지요.. 취리히에서 달성된 개혁을 다른 스위스 도시에 파급하려 하는데 문제는 이 개신교 내 두 세력들과 대치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세력들은 재세례파 입니다.. 이 재세례파는, 세례가 잘못됐으니까.. 카톨릭 세례가 잘못됐으니까 다시 세례 해야된다..라는 게 재세례파지요.. 츠빙글리보다 더 행동파입니다.. 더 행위에 초점을 맞췄지요.. 따라서 민중들은 재세례파에게 더 열광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공부 안해도 됩니다.. 재세례파는 츠빙글리보다 더 서방 교회의 전통을 모두 허물었고, 교회의 복음 위에 급진적으로 재건해야 한다는 신학을 가르쳤던 마이너리티였습니다.. 세례까지 부정했으니까.. 이들의 행동력은 가열찼고.. 이 행동파 단원들은 마치 자신이 성스러운 예외자가 된듯..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에 열정을 쏟았지요.. 두 번째는 조금 배운 자들.. 개신교 내에서 조금 배운자들.. 다시 말하자면 루터 교회와의 대립입니다.. 루터 교회는 전통의 무절제적 타파를 원치 않았습니다.. 개인을 억누르는 악습만 개혁하면 되지.. 너무 왔다.. 라는 것이지요.. 이 둘과의 싸움에서 츠빙글리는 이기기가 곤란했지요.. 행위 위주의 급진적 개혁 노선은 재세례파가 담당하고.. 지성을 강조하는 온건한 노선은 루터파가 담당했으니.. 츠빙글리가 설 곳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직 스위스에는 가톨릭 지지파가 남아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츠빙글리는 오직 말의 정치.. 로 풀겠다.. 라고 전략을 세웁니다.. 대단한 전략이지요.. 공의회처럼 말로 이기고 성경으로 증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면 되겠다.. 라는 전략을 세운 것이지요.. 이 전략은 뜻밖에도 성공합니다.. 비교적 문명이 발달된 바젤과 베른에서 먼저 가담하지요.. 유명한 도시들입니다.. 이 무렵 에라스무스가 바젤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에라스무스는 행동을 요구받았고.. 무작정.. 무턱대고 하는 행동을 싫어했던 에라스무스는 바젤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슈바벤이라는 바젤의 출판업자.. 이 출판업자는 에라스무스의 책을 내고, 그 다음 해에 루터의 책으로 돈을 버는데.. 츠빙글리의 책으로는 돈을 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흔 두 살이 된 1528년에 베른의 토론회에서 개신교 대표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는데, 츠빙글리는 루터와의 갈등이 깊어졌지만, 지지 자치주 들을 모아서 동맹을 결성하려고 말의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요. 쫓겨난 카톨릭 지지 자치주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연합을 형성합니다.. 이때 독일의 프랑크 푸르트가 속해있는 헤센지방.. 헤센 백작 필리프(필립Philipp) 1세가..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개신교 대동맹을 결성하는 구상을 하는데.. 그 중심에 츠빙글리와 루터를 끼워둡니다.. 헤센백작은 츠빙글리와 루터를 만나게 해서 화해를 시키고.. 마르부르크.. 개신교의 성지.. 카톨릭이 종교전쟁에서 엄청난 학살을 당했던 그 마르부르크에서.. 1529년 10월에 회담을 가지도록 주선하는데.. 이 때 루터와 츠빙글리는 엄청나게 싸웁니다.. 또 먹는 문제입니다.. 독일보다 가난했던 스위스에게 소세지는 독일인보다도 더.. 한자동맹의 도시가 많았던 도시보다 더 급한 문제였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그 무의식이라고 저는 진단합니다.. 성찬식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에 둘은 격렬하게 싸우지요.. 루터와의 협력이 완전히 단절됩니다.. 루터는 이른바 공제설을 주장합니다.. 츠빙글리는 상징설을 주장하는데 무슨 얘기냐.. 공제설이란 성찬식 때.. 축성된 떡과 포도주 있지요? 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실제로 공제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떡과 피를 먹으면 우리는 그리스의 영광과 생명을 얻는다.. 라고 믿는 것이지요.. 이게 공제설입니다.. 츠빙글리는 그것은 상징일 뿐이다.. 말 뿐이다.. 포도주는 실재하는 피가 아니라 그냥 상징이니까.. 포도주 잔만 들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주장하지요.. 루터 입장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카톨릭의 화체설.. 이른바 진짜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부정한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실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한데.. 츠빙글리는 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요.. 그의 영..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상징할 뿐.. 신비한 사물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견해가 왜 중요하냐면.. 떡과 포도주를 살리면 성직자 계급이 그만큼 지위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례가 복잡해지고 상징물이 확고해지면.. 그 의례는 화려해지고.. 화려한만큼 성직 계급은 보통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서 엘리트 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상징일 뿐이라고 하면 당연히 의례 의식은 협소화될 것이고, 의례 의식이 없어지면 민중이 그만큼 계급 질서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츠빙글리는 알았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의례가 다 파괴되면 아버지의 권위는 줄어듭니다.. 한국에서도 아버지의 권위가 줄어든 가장 핵심인 이유는 가정의 제사가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의례와 제사가 그 화려함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면 한국의 가부장제도는 아직도 유지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가 오히려 상당히 가부장적인 나라인데.. 이유가 프랑스의 의례와 범절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가 가장 문화적으로 늘 최첨단으로 앞서 와있다는 사실.. 그 전통을 함부로 망가트리지 않는다는 사실.. 유산을 보존하는 데에 프랑스는 상당히 우호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무조건적인 행위.. 무조건적인 타파.. 이런 것이 과연 혁명적이고 진보적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당장의 고통을 덜어준다 해서.. 전통을 파괴하는 것은 아주 나쁜 반항의 방식입니다.. 그 뒤에 민중의 고통은 더 커지기 때문이지요.. 제도는 그나마 전통적 제도는 일관된 체계와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완전한 무질서보다 덜 야만적일 수 있습니다.. 제도가 다 파괴되고 완전한 무질서로 가면.. 거기는 정말 야만의 꿈..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와 베른만으로 스위스 전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장담합니다.. 거의 전쟁이었는데.. 이 과도한 자신감에 우려를 드러낸 베른이 취리히와 갈라서지요.. 츠빙글리는 자신이 마치 나폴레옹이 된 것처럼.. 카톨릭 지방에서 생필품을 차단하는 경제봉쇄령까지 단행합니다..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것이지요.. 이에 여섯 개 주가.. 경제 봉쇄의 고통을 받게됩니다.. 우리, 슈비츠, 운터발텐, 루체른, 추크, 프리부르 주였는데 이 경제봉쇄령.. 가뜩이나 가난한데 경제봉쇄령까지 더해져서 힘들어지니 각 주들은 이제 츠빙글리를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군대를 모읍니다.. 용병이 아닌 내전이 시작된 것이지요.. 내전의 물꼬가 트자 츠빙글리는 선수를 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취리히의 병력을 이끌고 카펠로 직접 진군하지요.. 이 카펠은 뭐냐하면 이 취리히와 추크 사이의 접경 지역으로 예전에는 수도원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제반 시설이 있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야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가서 요충지를 잡고 그다음 정복 전쟁을 하겠다.. 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보를 먼저 파악한 카톨릭식 군대가 1531년 10월 11일 카펠을 먼저 급습해버립니다.. 카톨릭 군대는 7천명이었고, 취리히 군대는 2천명이었습니다.. 군대의 열세에다가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탈영병들이.. 거기다가 강행군.. 이 스위스를 걸어서 왔으니.. 트레킹 제대로 했지요? 강행군으로 지쳐있던 병사들은 오합지졸로 도망가버리지요.. 한 시간도 안돼 전쟁은 끝나버립니다.. 이 때에 취리히군은 약 5백 명 정도가 병력으로 전사했고.. 25명의 목사와 군대를 이끌었던 츠빙글리도 전사해버리지요.. 카톨릭 군대에 놓여있던 츠빙글리는 4조각 납니다.. 이단자로 화형해버리지요.. 죽은 몸을 또 찢어버리는 능지처참에 처해진것입니다.. 베른과 다른 칸톤.. 다른 주들은 취리히를 지원하러 군대를 보냈지만.. 2차 카펠 전투도 실패하고 취리히는 평화조약을 받아들이고 경제봉쇄령을 풉니다.. 츠빙글리가 전사할 때 몸에 지니고 있었던 투구와 두 자루의 검은 지금 취리히 국립 박물과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제가 사진을 보니까 한 자루의 검밖에 없는데 나머지 한 자루는 어디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것을 통해서 스위스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전사 정신까지 발휘한 영광된 행위였다고 자랑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주 슬픈 혁명이었습니다.. 사실 새로운 신앙을 가진 종교개혁자는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을 갖겠다는 운동이 아니었지요.. 츠빙글리의 뜻을 받아 종교개혁을 이끈 하인리히 블링거는.. 새로운 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1537년 츠빙글리가 죽고 6년 뒤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종교 개혁은 우리의 옛 신앙일 뿐 아니라 태고의 참되고 오염되지 않은 신앙을.. 새로운 분파라는 악평으로 끌어들이고자 원하는 이들에 대한 우정어린 경고다.. 칼뱅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이라 지칭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결코 새로운 것이라 비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옛것에 좋은 것으로 돌아가자는 그 운동에 츠빙글리는 정무적 감각이 부족했고, 사유능력도 부족했지요.. 열정에 비해 외교정치적 능력은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평도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동부지역과 프로이센 영토를 중심으로 파급됐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남부 고대지역과 스위스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파급되었는데.. 루터는 단지 교리를 살짝 수정할 것을 원했고, 츠빙글리는 사회 전반을 개혁하기를 원했지요.. 때문에 루터는 제후들의 후원을 받아서 그 종교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츠빙글리는 의회를 중심으로 개혁할려고 했는데 그 개혁 운동은 엄청난 실패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가난한 지방에 사는 자신.. 외교적 수완이 없는 자기의 민족.. 국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예기치 못하고.. 열정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사.. 투쟁했던 그런 맹목적인 행위주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세례파들도 실패해서 미국으로 도망가서 광신적 교회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역수입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개신교 중에 하나지요.. 전광훈 목사 같은 애들이 제세례파와 너무나 결이 맞습니다.. 이들은 결코 사회를 변혁시키지 않습니다.. 사회를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만들어서 후원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겠지요.. 자기정치를 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츠빙글리는 그런 분파들과는 달랐습니다..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과격한 평등지향이 불평등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유능력의 부재가.. 아니 애초에 사유하기 싫어하는 그런 습관이 종교 개혁의 그 뿌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철학사에는 종교 개혁을 이렇게 묘사해 두었지요.. 점점 성장하는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질곡을 타파하고자 한 시도 중에 하나는..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교회를 개혁하여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에 알맞은 교리를 만드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그러니까 진짜 평등한 사회를 위한 이정표로서의 목표가 아니라.. 사실은 신흥 계급으로 상승하고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의 자신의 이익에 맞는 교리를 수정하는 데 그 목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현재 유럽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 대부분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리를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세상이 무질서해지기를 원합니다.. 전통과 유산을 싫어하지요.. 질서는 민중을 보호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무질서를 원하는 그들의 감각은 오히려 계급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싸우면 중요한 가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통파괴와 무질서의 가중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설득당해서는 안되지요.. 조금 쉬었다가 결말 가겠습니다..
자, 결말 갑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마지막 말을 담아 왔습니다.. 전제 정치에서는 사유하는 것보다 행위하는 것이 훨씬 쉽다. 자, 무턱대고 몸만 부리려는 습성은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라는 진단이겠지요..? 민주주의의 감수성이 떨어질수록 사유보다 행위만 하려 듭니다.. 그것이 노동 숭배설의 기원이기도 하지요.. 생각없이 노동만 하려는 경향이 바로 전체주의적인 것이고.. 이 습관이 강화될수록 사회는 불평등해진다는 사실을.. 사유해야만 합니다.. 지젝의 말따나 멈춰서 생각해야 할 때가 이미 지나고 있지요.. 사유는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나 아렌트의 말입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는 중요하다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데카토.. 로마의 데카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의 정당성을 알아챌 수 있다고.. 인간의 조건 마지막 말에 담아두었네요..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다시요..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풀어 말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제일 활동적이고.. 맹목적일 때요.. 집중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외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혼자 있을 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어하고.. 그 혼자 있을 수 있을 때가 마련되면 고독은 쓸모가 없어지지요..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활동적인 노동이 힘을 발휘하려면.. 정적인 사유의 보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하길.. 사유는 약한 능력입니다.. 사유는 의심받고 사유하는 사람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삶을 즐기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하지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으면 엄마가 말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제 엄마는 제게 일하라.. 혹은.. 돈을 벌어라.. 라고 말했었지요.. 그만큼 사유는 오해당하고 모욕당할만큼 약한 능력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미래 위에서는 제일 중요한 능력이지요.. 사유하는 사람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렌트의 말따나 사유는 현재보다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당장에 필요 없다고 해서 결코 버릴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오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을 위해 제대로 살아낼줄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위한 삶은 오늘을 버리는 삶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유라는 미래성을 복원하는 데에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유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고..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 또한 언제나 드물죠.. 따라서 사유하고 있는 나 자신을 긍지할 수 있다면.. 오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멈춰서 생각해봅시다.. 마지막으로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첫 부분.. 헌사.. 제목이 붙어있는 좋은 말을 한 번 읽어드립니다.. 이 마지막 말을 엔딩멘트로 오늘 문을 닫을텐데.. 사유한다고 해서 게으르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몸을 움직여야 하지만.. 맹목적인 움직임은 오히려 전체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가 지금 아주 무력하게 하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막겠다고 몸부터 움직이다 보면.. 사유는 불평등을 가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계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특히 노조 지도자들 분들.. 사람의 몸을 함부로 이끌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투쟁은 여러 번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제대로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촛불이 아직 약했기 때문에 사회변화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혁명을 예비하려면.. 단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우리는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철학자들이 삶이라 부른 것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는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했다.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진실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소외된 모습들과 개별 실존의 가장 내밀한 국면까지 규정짓는 객관적 힘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싸구려 장식과 같은 거짓 정렬로써..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치장하고 기계부품에 지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무엇인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인 양 행동하게하는 소설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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