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역사 르네상스17> 77회 마르틴 루터 편 - '자신만의 성서를 가져야 한다.'

2022. 12. 11. 22:11철학의 역사

https://youtu.be/V-m5u0OFF_E



자발적으로 굴러가는 바퀴다.. 스스로 밝아지는 태양이다.. 밝고 맑게 흘러가는 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기초다.. 기운이 남는다면 단 하나만 추가하자.. 타자를 모른체 하지 않기..
세계에 있었으나 미처 깨닫지 못한 철학의 영광을 위한 방송.. 두 남자의 철학 수다.. 철학의 역사편 제 77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인문학도 메뚝씨 입니다. 오늘도 혼자 됐습니다. 똥팔씨가 좀 몸이 좋지 못해서요.. 빠른 쾌차를 빕니다.. 어서 돌아오셔야 되는데.. 몸이라는 게.. 한 번 망가지면.. 재활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나이가 이미 되었나봅니다.. 잘 낫고, 잘 돌아왔으면 합니다.. 자, 오늘의 방송은 루터입니다.. 마르틴 루터.. 이제부터 해야 될 이야기는 다섯 편 정도에 걸쳐 들어오는 종교개혁 특집인데요.. 종교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이것은 개혁운동이라고 해야 되는데, 당대에 종교를 중심으로 개혁됐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지요.. 르네상스를 다뤘으니 해야할 것 같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게 또 인생도 아니지만, 공부는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고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공부다.. 재차 정리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붙여서 배워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같은 것.. 비슷한 것.. 뭐 유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을 싫어했고, 종교개혁가들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증오했다.. 얘네들은 증오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비판했으나 루터와 동행하지 않았던 에라스무스나 로(? 토머스?) 모어가 단적인 예시..이겠지요.. 왜냐하면 인문주의를 경험한 인물들은 종교개혁의 그 복고적인 경향을 경멸했습니다. 쌓아올린 문화를 단 한번에 폐퇴시킬 수 있기 때문인데요.. 종교개혁가들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 라는 운동이었고.. 인문주의자들은 이미 다시 개선된 이 문화를 말살시킬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재차 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을 다루는 이유는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2권 15번에 쓴 광신자에 대한 이해가 어떤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지를 예시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해를 지속해야 하는데요.. 날마다 새 날이고.. 우리는 실존하기에.. 현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자.. 니체의 말을 한 번 톺아봅니다. 제목이 광신자입니다.. 읽어드립니다. 광신자들이 그들의 복음이나 그들의 스승의 편에 서야 할 경우, 아무리 피고가 재판관처럼 행동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거의 매순간 자신들은 인정돼야만 하는 예외자..라는 생각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저희집 막둥이가 이 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것 또한 한 번 읽얻릴테니 음미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광신자들은 하나의 반동적인 충동으로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그것의 근거는 그들의 충동과는 너무나도 먼 길에 놓여있다. 그들이 보유한 단 하나의 근거는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예외자라는 것.. 자신의 반대자들이 신으로부터 버려진 악령들이라는 생각 뿐이다.. 종교개혁은 자신을 예외자라고 믿는 선민적 충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선민적 충동은 반동적 충동이지요.. 왜 그런가? 서문에 썼지만, 스스로 깨달은 자들은 타자를 배제시키지 않습니다. 타자를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실현하고 싶어지는 충동 또한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충동은 욕망이라고 합시다. 루터, 칼뱅, 츠뱅글리, 로욜라, 부르노..를 다룰텐데 이 다섯 명의 신교조(?)들은 종교개혁의 방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입체적으로 논하면서 우리는 러셀이 서양철학서에서 말한 이 말을 재고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이나 반종교개혁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이지적인 이탈리아의 지배에 대해 문명화가 덜 된 국가들의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겁니다. 반항은 노예의 도덕이구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관성의 노예성에 대해서 모른체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을 아주 치열하게 한 번 해부해 보겠습니다. 아파도.. 반항은 저항일 수가 없습니다. 저항을 위해서는 차분해져야되는데.. 차분해지기 위해서는 입체적인 지식이 요구되고.. 입체적인 지식은 날마다 새 날에 들어오는 그 많은 자극으로부터와의 투쟁을 성공시켜야 그 승리로부터 출연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반지성주의적 반항이.. 끝내.. 끝끝내.. 승자독식의 봉건제적 정치방식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렵더라도 우리는 역사와 비전을, 과거와 미래를, 차분하게 더듬으면서 나아갈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니까요.. 시오노 나나미의 말따나.. 신의 대리인에서 멍청한 독일인들만이 속아서 면죄부를 샀다..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 말따나 우리는 종교개혁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면서 우리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들을 거역할 때.. 그리고 거역한 후.. 무엇을 향해 가야하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혁명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혁명은 과도기이죠.. 혁명을 통해 무언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지요.. 혁명을 통해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혁명이 완수된 결과만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여기에 너무 무력했기에 변화의 계기들마다 많이 많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역사를 또 거꾸로 돌리고는 했지요.. 많은 빈궁한 사람들이 그 와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불행에 떨어지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우리의 집중력이 서툴렀기 때문이라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 르네상스 시기.. 16세기에.. 이탈리아에 대한 북유럽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정은 영국 속담에도 있다고 버트런트 러셀이 서양철학사에 써 놓았네요.. 이런 속담이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와(이탈리아화한?)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작가가 셰익스피어.. 이겠지요..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종교개혁과 영국인들의 역사를 너무 많이 읽었고, 그것만으로 편파적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육과정을 짰기 때문에.. 한쪽 만의 이야기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반동으로 만들어낸 종교개혁도 개혁이고, 인간의 욕망을 완성시킨 르네상스는 단지 취미생활의 한 방편으로 즐겨야될 예술품으로 전락해버린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해 말씀드리는데.. 르네상스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된 반동이.. 그 반동의 반항운동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로마를 망가트린 게르만족처럼..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를 목표로 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로마를 망가트린 게르만족의 침범을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도부를 붕괴시켰지만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하나의 위기였지요.. 1527년 그 유명한 사코디 로마.. 로마 약탈이 루터교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게르만은 로마나 라틴족에 대한 열등감이 너무나도 깊지요.. 오늘날에도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이탈리아인에 대한 게르만족의 혐오는 열등감입니다. 풍요를 사치로 오역하면서 향유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문화와 예술의 향유는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온통 유네스코로 지정해놓고 자본주의의 발전까지 막아버리는 이중성.. 이것을 우리는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야만과 반동으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개선과 창달로서의 혁명이 가능한 것이지요.. 이 개선과 창달로서의 혁명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한데.. 그 이유인즉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내용을 두고 해야할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따라서 광신자적 혁명성에 대해서 그것을 그 선민사상의 그릇된 광기에 대해서 재고해보겠습니다. 힘과 부가 있어도 천박한 국가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가깝게는 미국과 중국이 그렇지요? 중동도 돈을 벌(게 됐더니? 해줬더니?) 우리나라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인즉.. 반동적 종교개혁이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군주.. 그러니까.. 16세기에 교황이 아니라 군주.. 새롭게 세습권력을 획득하고 싶어하는 각 나라의 군주의 권력강화를 위해 전통적인 가톨릭적 연합이 아니라 종교개혁가들과 군주들은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신교도들이 교황만큼이나 왕에게도 복종하기를 싫어했다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도 복종하기를 싫어했던 이 반항의 노예는 18세기와 19세기로 이어져 자유주의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종교개혁으로 만들어낸 자유주의의 체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죠. 자유주의가 타자를 배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스스로 굴러가서 일으킨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차별을 강화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들은 선민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이 부분을 아주 자주 공격하지요.. 겉으로는 선한 도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본래부터 그들의 도덕은 반동적인 도덕이고, 그들의 윤리는 노예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카톨릭의 부패만으로 이루어진 개혁운동...이라고 하는 편파적인 이해는 그릇된 것이지요.. 교황이 더 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직자와 귀족들, 심지어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길드 부르주아지와 용병대장들 모두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두의 문제가 교황의 문제로 환원된 것이지요. 따라서 하우징아가 말한 다음의 문장은 오늘날의 우리가 매우 루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루터주의적 삶이라고 합시다.. 그나마 루터는.. 그나마 르네상스적 기질을 묻히고 있으니까요.. 추후에 조금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터적인 삶을 살려고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야릇한 비판의식을 돋게합니다. 하우징아는 에라스무스의 이런 말을 쓴 적이 있지요. 루터가 보통 사람들의 귀에 호소했다면 에라스무스는 교양인들의 관심이 호소했다. 교회의 개혁을 원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동일했으나 에라스무스는 학문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원한 반면, 루터는 복음적 열정에 바탕을 둔 투쟁의 노선을 걸었다. 에라스무스는 초창기의 종교개혁에는 동조적이었으나, 결국에는 종교개혁파들과 결별하여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이 가진 넌센스가 우리와도 절대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도 뿌리가 깊은데요.. 한국에서의 루터교의 뿌리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 최초의 방문 선교사.. 루터교 입니다.. 이름이 칼 귀츨라프..이지요.. 이 귀츨라프가 1831년에.. 32년에 충남 보령 고도에 상륙해 한 가지 중요한 작물을 우리에게 선물했는데, 그 작물의 이름이 감자..입니다.. 그러니까 감자는 우리의 전통 음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감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라틴아메리카에서 재배된 감자와 담배같은 이 귀중한.. 옥수수같은 작물들이 임진왜란 때 잠시 들어왔다가 우리는 다시 그 작물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감자가.. 먹기 시작한 영향이 루터교였다는 것.. 루터교가 감자를 먹게 하는 또 하나의 큰 영향이 바로 박정희 입니다. 왜 우리가 감자를 많이 먹느냐? 박정희 탓이 가장 큽니다. 감자는 빈궁한 국가의 상징 작물이지요.. 프로이센이 감자를 많이 먹었고, 가난한 아일랜드가 감자를 먹다가 감자기근으로 미국으로 도주했고, 그리고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한국이 감자를 통해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감자가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배고픔이 달래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박정희라는 인물이 그것을 도왔지요.. 1970년대 80년대를 살아낸 분들은 새마을 운동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 새마을 운동은 덴마크로부터 빌려 온 것인데, 덴마크 건국의 아버지가 그룬트비히.. 라는 사람이고..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북유럽 국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역시 국민의 95%가 루터교..이지요.. 이런 농담도 있다고 합니다. 산타클로스도 루터교인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들어온 루터교와 새마을 운동으로 확장된 그 루터교가 대한민국에서는 비주류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은 루터교가 관에 의해서 보급되었음에도 민간은 칼뱅교도들이 다수지죠.. 루터만 하더라도 아직은 그래도 지적인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인들 중 라틴어를 구사하고 루터의 르네상스적 질감의 독일어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다언컨대 드뭅니다. 이런 반지성주의 경향이 복음, 선교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요즘에는 카톨릭 교도들까지 공부를 안합니다. 선동으로 선교하려는 풍토가 너무나도 깊어졌기 때문이지요. 이런 선동선교 문화는 대한민국이 압도적 세계 1위 입니다. 가장 큰 교회가 이 땅에 있고, 그 가장 큰 교회를 만들 수 있는 메카니즘이 이 땅에서 시작됐습니다. 오히려 여의도 순복음교회 같은 그런 문화를 미국이 역수입하고 통일교 같은 이상한 선교문화를 일본이 역수입하는 이런 재미난 현상까지도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다만 루터 까지도 르네상스인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16세기에 활동했기 때문이지요.. 15세기에 태어났고.. 그 단적인 예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제가 좋아하고 많이 들어봤던 현대철학자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1931년에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교수자격 논문을 씁니다. 그리고 이 논문을 통해서 31년 5월에 프랑크 푸르트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는데, 그 논문 심사를 맡은 철학자가 폴 틸리히..이고.. 이 틸리히가 루터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직은 루터가 르네상스인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마르틴 루터는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람이다. 여기에 루터의 위대함이 있다. 사람들이 그를 루터파와 동일하게 본다면 그가 가진 위대함의 진가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루터는 루터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몇 안되는 위대한 예언가 중 한 사람이다. 르네상스 인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는 루터주의와는 다르지 않고, 종교개혁의 선봉장으로 루터를 꼽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맑스와 맑스주의는 너무나 다르고, 니체와 니체주의는 너무나 다른데, 그런 결로 루터와 루터주의도 다르다고 틸리히는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하나의 예시가 있습니다.. 루터가 아직은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사실.. 맑스와 니체가 동시에 인정한 손가락이 있지요? 하이네..입니다.. 이 하이네가 독이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난쟁이는 당연히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특히 난쟁이가 안경을 썼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거인의 실수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는 하나 거인의 심장 안에 깃든 고귀한 감정마저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거인의 심장이 결여돼있다. 루터의 견해가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 루터가 거인이고, 우리는 루터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루터가 가지고 있는 그 뜨거운 심장을 가졌다는 오해를 품고있다는 지적입니다. 저는 뭐 100% 동의할 수는 없기는 한데.. 이 말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있다고 해서 내가 난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만 잊습니다. 누군가의 위대한 사람의 곁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스스로에게 더 가혹하고 더 실랄하며 더 열정적인 자극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탈려고 합니다. 거인이 되어야지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인이 되어야지요.. 거인의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가지요.. 그 뜨거운 심장.. 위에 올라타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르네상스는 그 거인의 뜨거운 심장의 비유적인 말이고.. 그 르네상스인들의 상승하는 기운을 벗삼아 우리도 힘들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거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안전한 난장이가 아니라.. 루터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인간 루터에 대해서 다뤄볼텐데.. 오늘 혼자 하니까.. 엄청나게 빨리 달려와버렸네요..? 내용이 많습니다. 한 번 더 듣기를 추천드립니다.. 조금 쉬었다 오겠습니다.
자, 방송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루터의 인간사.. 1483년 11월 12일에 태어납니다.. 라파엘로와 동년배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완성본이 라파엘로인데.. 같은 해에 태어난 루터는 완전히 다른 결의 삶의 살아갑니다.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의 기질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겠지요.. 독일인들은 예술과 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초기 기독교 사상으로 회귀하고 싶어했죠. 예술과 철학은 이들에게는 세상을 망친 근본 요소였습니다. 반면에 이탈리아인들은 예술과 철학의 황금기를 복기(?복귀?)하고 싶어했습니다.. 완전히 다르지요? 이 두 기질의 차이가 게르만과 라틴 문화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게르만 문화의 압도적인 승리 후, 창달될 문화현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풍요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에 산다고 요컨대 말할 수 있겠지요.. 좋은 것을 누리는 데도 눈치를 봐야 합니다. 다만 자본이 허가한 사치만이 가능하지요.. 저는 여행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가고싶은 곳이 아니라 가라고 하는 곳에 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선 왜인가? 가고 싶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고 싶은 곳이 왜 없는가?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가고 싶은 곳이 있겠습니까? 이 반지성주의는 우리를 그래서 가고싶은 곳으로 없게 만들고 가라고 하는 곳에 가게 해서 우리가 겨우겨우 획득한 쌈짓돈을 자본의 이득을 통해서 날려버리는 이 폭력을 이중 경험하게 돕는 것이지요.. 따라서 풍요로써 무언가를 배우는 습관.. 이거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는 독일 아이슬레벤 이라는 곳에서 한스 루더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 아홉째 자녀 중에 차남으로 출생합니다. 자.. 태어난 다음날 11월 11일.. 우리가 빼빼로 데이라고 섬기는 그 날에 베드로 바울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데요.. 당시에는 태어나자마자 세계를 받는 게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유아 사망율이 높았지요.. 아이를 깨끗하게 찬물로 씻겨야했으니까요.. 태어나자마자 깨끗한 찬물로 씻기고 세례를 받다가 아이가 죽는 경우는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는 그 아이의 시신이 몇 천구씩 지하에 묻혀있기도 했다는 사실.. 왜냐하면 원죄론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것 또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원죄론을 느낄 수가 없는데.. 특정한 사람들은 그게 너무나도 깊이있게 느껴지나 봅니다.. 여하튼 루터는 자신이 성공담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날에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은 11월 11일이 바로 성자 마르틴의 축일이기 때문이지요.. 루터의 이름이 마르틴인 이유지요.. 자.. 루터의 이름이 마르틴인데 우리는 마르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성자 마르틴.. 혹은 튜르의 마르틴으로 알려진 사람에 대해 잠시 짚고 갑시다.. 이것이 루터의 기질.. 혹은 루터의 계급까지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마르틴은 316년경의 헝가리 출생입니다. 파노니아라고 불리는 곳이 헝가리..이지요.. 열살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아빠가 군인이었습니다. 아빠가 군인이었다는 것은, 그 당시가 로마시대였으니까.. 더군다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이었으니까.. 헝가리의 용병으로서의 기마병으로 참여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반란이 심했(으니까?) 당연히(?) 프랑스 갈리아 지방에서 근무를 하게되는데.. 이 때 고난이 쎘나봅니다.. 잘 싸웠다고 전해지고.. 잘 싸워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 아미앙에서 복무하고 있는데, 너무 추운 겨울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너무 추운데 옆에 거지가 한 명이 아무런 옷도 없이 지나갔다고 하네요.. 자기도 추운데 거지도 얼마나 추울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겉옷을 반으로 잘라가지고 나누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마르틴은 양복장이.. 조금 좋은.. 고급 언어로.. 사르토의 수호성인이 되게 됩니다.. 양복 만드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마르틴을 성자로.. 오늘날까지 모시고 있지요.. 전쟁에 지친 마르틴은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 제네바 호숫가의 작은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투르 지방의 전설적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주교로 와달라고 엄청나게 청을 합니다. 들은 척도 안한 마르틴은 호숫가에서 자적하고 하나님과 만나면서 보냈는데.. 어느 날 거위들이 하도 시끄럽게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집에서 나가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하고 프랑스 투르로 갔는데.. 투르로 가서 주교의 자리에서 제도를 정비하라고 초대했더니 성벽 바깥에 오두막을, 골방을 한 짓고.. 거기서 겸손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마르틴이 군인이었으니까.. 말 타는 사람, 군인.. 그리고 마르틴이 반을 찢어서 자신의 옷을 나누어 주었으니 사르토.. 모직업자.. 그다음에 거지한테 주었으니 거지.. 그리고 성벽 바깥에 오두막을 지었으니 여관 사장님들.. 그리고 로마의 와인제조법을 프랑스에게 전수했으니 와인제조자.. 그리고 작은 상업.. 소매업자들이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이 마르틴한테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흔히 마르틴병..이라고 하면 술에 취한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는데요.. 여기에 루터 집안의 계급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장하던 부르주아 상인 계급의 대리자가 성자 마르틴..이라는 뜻이고.. 마르틴의 축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루터 집안이 신생 부르주아였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신생 부르주아는 1차산업 혁명의 수혜자들이었기 때문에, 모직업자, 혹은 여관 경영자, 혹은 와인제조업자 아니면 군인.. 아니면 양복제조업자인 사르토.. 이정도가 중간 계급으로서의 신흥 세력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밌지요? 루터의 모친 이야기도 좀 재미있는데요, 이 광신적 기질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모친은 이름은 마가렛 루더.. 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이 루터가 아니라 루더입니다.. 마가렛 루더는 아주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광신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한 예시가 딸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루터의 엄마 마가렛 루더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아주 사랑하는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습니다. 엄마는 그 원인이 마녀..라고 의심하는데.. 자기 딸이 너무 예뻐가지고 마녀가 샘을 내서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으로 믿었지요.. 그 마녀가 옆집 여자라고 확신한 루터의 엄마는 그 옆집 여자가 심판을 받기를 기다렸는데, 실재로 얼마 후에 의심하고 있던 그 옆집 여자가 마녀 재판으로 공개처형 당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마녀재판을 정당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밖에.. 믿게 되지요.. 그러면서 그 광신적인 기질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웃기지요? 오비이락인데.. 그 오비이락이 우연이 겹치면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광신적인 기질로 만들어버리니까요.. 반면에 아버지는 광산업자였습니다. 인터넷에 자료들과 또 어떤 책에는.. 실명을 말하고 싶은데요.. 참습니다.. 종교는 무서우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인들입니다.. 광부로 번역해요.. 광부로.. 루터가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것을 광고해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를 신화화시키기 위한 멍청한 번역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광부가 아니라 광산업자였습니다. 근대 이후의 이런 광산업자를 석유재벌이라고 부르지요.. 만만치않은 부자였다는 뜻입니다. 엄마는 광신교도.. 아빠는 부자.. 이 분열증 속에서 루터는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루터는 자기 이름을 사랑하기가 뭐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루더라는 성을 싫어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루더라는 그 뜻이 독일어로 사냥꾼..이라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냥 사냥꾼이 아니라 덫을 놓는 사냥꾼입니다. 사냥감을 유혹해서 잡는 사냥꾼이지요.. 그런데 루터라는 이름은.. 루더와 다르게 헬라어에서 따왔는데.. 엘류테로스eleutheros에서 앞뒤 글자를 빼고 가운데만 취한 것인데.. 앞뒤 글자를 빼고 가운데만 빼서 엘류(?엘유LU?)테로스 라는 말을 만들면 그 뜻은 보존되는.. 그런 이상한 맞춤법도 독일에서 유행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어와 로마 라틴어를 자기 마음대로 각색해서 쓰고, 그 각색한 이름을 성까지도 바꿀 수 있는 그런 풍습까지 있었다는 것이지요.. 엘유테로스는 자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냥꾼에서 자유인으로 바뀌었지요. 스스로 바꿨는데 두 가지 설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잡설로 한 번 그냥 다뤄보겠습니다. 하나는 1512년 설이고.. 하나는 1517년 설입니다.. 1517년 설부터 소개하고.. 이게 정론으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1517년이 95개조 반박문이 개시된 그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517년 루터가 34살 때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해..라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반박문 개시일 뒤에 바로 이름을 바꿨다는 주장이지요.. 설득력이 있고 없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여기에서 또 변태스럽게.. 이 설을 반박하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이쓴데.. 이게 그 노력이 1512년 설입니다.. 1512년은 루터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입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복음의 자유를 체험했기 때문에 사냥감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빠뜨리는 인생에서 복음의 자유를 체험했기 때문에 사냥감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빠뜨리는 사냥꾼의 인생에서 성서의 복음으로 타인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변화됐다는 선언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당시 독일어에는 표준어 표기가 정착돼있지 않았기 때문에 루더는 다양한 표기로 쓸 수 있었는데, 이 다양한 표기를 이용해서 말을 바꿨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석사, 신학박사학위 서명에서 루터라고 기록돼있습니다. 스스로 인생을 바꿔 신생을 살고 싶은 루터의 욕망이라고 저는 읽습니다. 그런데 이 신생을 예비하는 이 삶이 이탈리아인들하고 너무나 다르지요..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베아트리체, 라우라, 마리아.. 라는 현실적 존재를 관통해서 신적인 체험을 했는데, 루터는 현실적 기반 없이 신과 직통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신생을 위해 현실을 부정하는 반동의 결과가 되는 것이지요.. 현실과 일상을 우리가 풍요롭게 개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아야 합니다. 비싼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어야 하지요.. 여하튼간에.. 두 설 모두.. 사냥꾼이라는 천박한 독일식 이름에서 자유라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지적인 이름으로 스스로 개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 사실을 통해서 루터까지만해도 반지성주의는 그나마 르네상스 지성주의의 눈치를 봤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은 완벽하게 초기 그리스도 정신으로 돌아가는 반지성주의가 되지만, 루터까지만해도 반지성주의는 지성주의의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다음은 루터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스펠트라는 곳에서 유년기, 학교 생활을 하는데요.. 이 만스펠트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요.. 유학을 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루터는 라틴어 기숙학교를 다니는데 엄청나게 빡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독일에 라틴어 기숙학교는 비쌌어요.. 루터는 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루터는 자신의 이 시절 공부를 악몽으로 기억하는데 훗날 대교리문답 이라는 글에서 이 엄격한 교육에 대해 비판하는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요.. 루터가 받은 그 엄격한 교육 덕분에 루터는 삶의 인간성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함 그 자체가 교육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루터로부터 이어지는 자유주의는 이 직접적이고 사적인 폭력적 기억에 너무너무 집중합니다. 트라우마라고 집중하고, 상처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 과도하게 포장된 사적 폭력의 기억은 구조적 폭력에 민감해지려는 감수성을 막기도 합니다. 오히려 엄격한 교육이 중요한 경우가 더 많지요. 단 그 의미를 그 엄격의 의미를 설득해내야 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지요.. 그 어떤 과업보다 어려운 것이 교육입니다. 저도 맨날 한숨을 쉽니다. 특정한 방법으로 교육을 바꿀 수 있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교육 개혁은 절대적 권한을 요구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이 절대적 권한의 단독자와 만날 때 비로소 아주 작은 부분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라틴어 기숙학교의 오랜 전통인 엄격성은 사실 루터라는 인간을 보다 큰 인간으로 만드는 도움이 되기도 했고,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고 그 쉬운 교육 방법으로 선전에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은 어려운 문제이구요.. 엄격한 교육 또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고 부분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담대한 인간이 하는 것이 교육이지.. 약삭빠른 인간이 하는 게 교육은 아니니까요.
자, 조금 더 루터의 삶의 무늬를 톺아봅니다. 1497년부터 1501년까지 청소년 시절 루터는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공부를 하는데, 이 때는 라틴어 전문 학교와 다르게 조금 유순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자신이 하숙했던 고타 가족 집의 분위기 덕분인데요.. 루터는 이 집안의 신실한 분위기에 반했다고 전해지는데 학창 시절에 계속 우울했는데 고타 가족과 함께 하면서 아이제나흐의 생활 만큼은 기쁨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네요. 이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합창단 단원이 되기도 합니다. 신나게 노래를 불렀지요.. 그리고 이 노래가 음악이 자신을 위로하고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라고 스스로 믿게 된 루터는 훗날 찬송집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찬송집.. 우리가 교회에 가면 성경 옆에 붙어 있는 찬송집.. 이 문화를 만든 것이 루터..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회들은 목회를 듣고 노래를 부르는 그런 예식 문화를 갖게 되었는데, 그 예식 문화를 창달한 사람 또한 루터라는 것입니다. 18살.. 이제 고타 가족에서 떠난 루터는 홀로 에르푸르트 대학에 갑니다. 에르푸르트는 당시의 2만5천명의 시민이 살았던 대도시라고 루터 속의 책들에 씌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에르푸르트가 대도시라는 사실인데.. 피렌체의 인구는 14세기에 이미 10만을 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절 독일과 이탈리아의 격차가 이 인구 수에서도 여전히 드러나네요.. 루터의 고백에 따르면 대학 시절은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 유일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게 뭐냐하면 도서관에서 성서를 만난 거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루터는 아직 대학에 가기 전.. 도서관에서 성서를 한 번도 못만나봤다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제대로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대학 전까지 성서가 한 권도 없었다는 것은.. 당시 독일에서 성서를 출판하는 문화가 전무했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 비싼 라틴어 학교에서도 성서 책 한 권 제대로 된 성서 책 한 권 도서관에 구비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리고 부자인 루터가 다녔던 모든 학교에서 책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독일 교회는 성서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사제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책이 귀했던 탓이지요.. 책이 이때까지도 16세기에 다다르는 때까지도 상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도시에서도 책을 읽는 문화가 없었다는 것은 독일 문화가 얼마나 큰 두께에서 반지성주의를 출현시켰는가를 알 수 있겠지요. 루터는 자신이 깨달은 성서의 내용을 토대로 사제보다 성서가 더 중요하다..라는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있지요.. 하나는 계몽이 필요하다.. 사람들한테 성서를 읽혀야겠다.. 그런데 지금이야 이 계몽이 당연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라틴어가 문제가 아니라 독일어를 아는 사람도 당대에는 소수였습니다.. 문맹률이 90%가 넘었는데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1%가 안됐고, 나머지 10%도 독일어를 겨우 아는 수준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루터가 강조한 계몽은 사실 그 10%의 계몽입니다. 독일어로 쓴 성경 또한 그 10%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그 10%를 우리는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루터의 경우는 부르주아의 경우인 것이지, 만인의 계몽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짚고 가야합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데, 부정적 의미.. 그것은 사물이 사람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첫번째 의미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명분인 것은 맞습니다만.. 사실은 저에게 집중되는 것은 그 두 번째 의미입니다. 사람에 대한 감수성 대신에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던 것이지요.. 사제 대신에 책을 보게 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사물을 모셔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민첩한데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둔감하다는 사실은 종교개혁 이후로 만들어진 몸이 우리의 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전에 강의를 할 때.. 어떤 분이 주차장 무료 티켓에 엄청 집착하는 것을 보았는데.. 돈이 없지 않은 그분에게 느꼈던 것은 내가 그 분을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있다..라는 것을 못느낀다는 것입니다.. 철학 강의를 들으러 왔는데.. 주차장 쿠폰에 집중하는 것은.. 사람이 예민해지기를 바라는 이 강의의 목적과는 완전히 배리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저의 눈을 느끼지 못했지요.. 이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사물에 대해서는 엄청 집착하는데.. 사람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고 어떤 분위기 속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프지 않으면서.. 사물이 내 곁에서 멀어질 때.. 내 소유권이 아니게 될 때.. 혹여는 붕괴될 때 우리는 되게 민감하다는 것.. 이 몸짓을 그런 체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도 종교개혁의 루터로부터 라는 것.. 우리는 그 계보를 충분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내 체질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다보면 사람에 대한 둔감한 것도 내 잘못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아지는.. 노력할 수 있는 시초의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요? 내 탓이 아닌 것을 우리는 슬퍼하거나 미워할 권리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성서에 빠져살던 시기에 스무살이 된 루터는 아버지의 중간계급적 특징.. 부르주아적 특징으로 일단 대학 나오고 성공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죽음의 문턱을 경험합니다. 고향에 가던 중에 다리 동맥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기도 하고, 스물 두 살이 된 1505년에는 흑사병으로 동생 두 명을 잃기도 하고.. 다니던 대학교에 세 명의 교수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법학과에 등록한 지 6주 정도 지난.. 1505년 7월 무렵에는.. 휴가차 다시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폭풍과 천둥 번개를 만나기도 합니다.. 겁에 엄청 질린 루터는 곧바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서 아빠가 석사 학위 졸업 선물로 준 그 비싼 법률 책을 중고로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에서 가장 엄격하다고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이 고백..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이 고백 속에서도 루터의 시기가 르네상스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안나는 마리아의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성 안나는 12세기 전까지 서방교회에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르네상스와 함께 성 안나는 관심을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동방 교회에서는 6세기 때부터 이미 성안나를 성인으로 모셨기 때문이지요.. 이를 수입한 도시국가가 피렌체였고, 이 피렌체 사상이 유럽에 퍼지면서 성 안나는 성인으로서의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 또한 피렌체의 영향사 속에 있는 르네상스적 기질의 사나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안나라는 이름이 이렇게 많은 이유도 사실 이 동방교회가 갖고 있었던 그리스적 질감.. 인간의 인간의 인간.. 그러니까 성인도 인간의 인간이었다는 사실.. 여기서부터 출현한다는 것이구요.. 때문에 종교도 인간성을 회복하는.. 종교까지도 인간성을 토대하는 그 축에서만 가치가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는데.. 들어가자마자 후회합니다.. 너무 벅찬 생활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았는데 수도원 문화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말 고단한 삶의 스케줄을 수도원 문화에 정착시킵니다.. 이 스케쥴은 이슬람 문화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우리의 수도원 문화에서는 완전히 없어진 문화입니다.. 어떤 문화냐? 우선 엄청나게 일찍 일어납니다.. 상상초월로 일찍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시각이 한 시 사십오분 입니다.. 새별 1시 45분.. 왜냐하면 2시에 기도회 모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한시 사십오분에 일어나서 두시에 기도회를 하고.. 잠깐 30분 잔 뒤에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두시간 연속 예배를 드리고.. 곧바로 노동, 기도, 강독.. 반복되는 예배가 오후 한 시 사십 오분까지 이어진 다음에.. 두 시간 낮잠을 잡니다.. 두 시간 낮잠 잔 이후 4시부터 또 다시 일과가 이루어지고 10시나 11시쯤 취침에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자는 시간이 3시간이다.. 세시간.. 이 어마어마한 스케줄을 계속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루에 다섯 번은 의무 예배입니다..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이렇게 다섯 번은 기본입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신성과 만나야 생활의 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평정심이 유지된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기 때문이고 저 또한 이 주장에 동조합니다. 확신을 버티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지요..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고, 한 끼만 안먹어도 내가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 몸입니다. 이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루터에게는 수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지 수도원에 있는 것이 꿈은 아니었겠지요.. 빨리 수도사가 돼야 이 수도원 생활을 끝낼 수 있으니까.. 수도사가 되는 게 꿈이지.. 수도원에 있는 게 꿈은 아니었겠지요.. 반면에 이슬람은 하루에 여섯 번 의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빼놓지 않고 드리고 있지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이슬람 수도사들은.. 사실은 자본주의의 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가 설득할 수 없는 몸을 갖고있었다는 것.. 이것을 기억할 필요도 있습니다.. 저 중동의 나쁜.. 이상한 근본주의자들 빼고.. 진짜로 이슬람은 생활의 확신으로 신성을 지키는.. 그 믿음의 종교였다는 사실도 우리 알필요가 있습니다.. 대학 나온 수도사 루터는 단번에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데, 그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10년 27살 나이에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당시는 율리우스 2세 시절이었지요.. 율리우스는 다 아시다시피 자신이 황제라고 느꼈고, 말타는 검.. 책보다는 나한테 검을 그려라.. 라고 명령할만큼 로마황제와 자신을 일치시켰던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입니다. 이 율리우스 2세 시절 때.. 그 유명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여기서 활동하기도 하지요.. 저는 루터 책을 읽었는데.. 이 율리우스 2세가 율리우스 3세로 기록되어있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시는구나.. 루터는 엄청 들뜬 기분으로 룰루랄라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의 구석구석을 다니지요.. 종일 다녔습니다.. 그리고나서 환멸을 느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지옥이 있다면 지옥 위에 로마가 세워진 것이다.. 독일 촌뜨기에게 로마는 비현실적이고 환락의 도시였지요.. 더구나 루터는 청빈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였습니다..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숙소조차도 변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지요.. 숙소가 조금 더 화려해지고 음식이 조금 더 풍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마른 빵을 먹었어야 했는데.. 로마로 가면 갈 수록 기름진 빵을 먹게 되고 와인은 당연한 식사 조건으로 기록되고 돈을 내지 않아도 당연히 하는.. 누리는 그런 풍요로서 들어왔지요.. 독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더 놀라운 충격은 이 로마의 사업입니다.. 종교를 위한 이 사업성.. 여기에 깜짝 놀라지요.. 예시만 몇 개.. 몇 가지 다뤄드립니다.. 일단 거룩한 계단을 두고 이 스물 여덟개의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올라가면.. 연옥에 갔을 때 영혼 하나를 구제할 수 있다..라고 선전해서 돈을 받았습니다.. 모든 전시된 성유물은 모조리 돈을 내야했는데.. 뭐가 있었냐? 로마에.. 모세가 모았다는 떨기나무 가지.. 비쌌습니다.. 헤롯 왕 때 베들레헴에서 살해당한 갓난아기의 뼈 삼백조각.. 베드로의 머리카락..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박았던 그 못.. 유다가 예수를 팔고 받은 은전 하나.. 유다가 목매달아 죽은 대들보.. 심지어 베드로와 바울의 시신을 나누어서 성당에 각각 몸을 반쪽씩.. 성바울 대성당과 성베드로 대성당에 안치하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르네상스적 문화.. 루터가 갖고 있는 순수 지는 당연히 파괴되었고, 원한과 복수의 칼로 변하고 싶어했지요.. 로마를 통해서 새로운 종교문화를 배우고 싶어했던 루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부패의 결과가 아니라 로마를 고대의 로마와 일치시키고 싶어하는 이 르네상스적 기질이 중세의 종교성을 극복한 사례로 들어온 것인데, 이것이 루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면죄부 뿐만 아니라 이 성지순례나 아니면 이 성물에 대한 애착은 강요한 문화가 아니라 교황청에서 강요한 문화라기보다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라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물을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 요구로 그 성물들이 하나하나 사업화된 것이지.. 이것이 진짜 계획돼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했습니다. 특히나 독일 사람.. 이렇게 환멸을 느끼고 돌아왔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수가 됩니다. 성직자이자 설교자이자 교수가 된 루터는 당시 이 지역, 작센 지방의 대단한 명망이 있는 지도자로 등극하지요. 이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유명한 1517년 루터 나이 34세에 발생된 문제이지요.. 사실 이것은 레오 10세가 율리우스 2세 다음의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판매해서 만들어진 문제라고 알고있는데 사실은 세부를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알프레히트라는 놈이 있었는데 얘가 면죄부를 팔아도 된다는 레오 10세의 허가를 아주 유용한 사업으로 변환시킵니다. 그래서 면죄부 지침서를 발행합니다. 이 지침서는 얼마짜리 면죄부를 사면 연옥 몇년 탈출.. 얼마짜리 면죄부를 사면 다른 사람, 가족의 연옥 몇년 탈출.. 이게 아주 꼼꼼하게 들어있는 지침서이구요.. 이 지침서에 따라서 세금을 거뒀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지침서가 발행했다는 것이, 강매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사면 됐습니다.. 이것을.. 그런데 독일인들이 재산을 몽땅 털어서 면죄부를 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성이 아닌데 강을 건너서 목숨 걸고 비텐베르크로 와서 면죄부를 살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사실 비텐베르크는 1485년에 체결한 라이프치히 분할 조약이라는 것 때문에 동과 서의 지배권이 달라서 알브레히트의 면죄부 판매가 불가했지만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왔고 면죄부가 더 없냐고 극성을 부렸습니다. 산과 강을 건너다 죽은 사람이 비일비재 했고요.. 이런 사건을 보고 비템베르크 교수였던 루터는 안되겠다.. 싶어서 95개조가 되는 논제를 대학 문턱에 붙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논제는 사실 대학 사회에서 정식 토론을 한 번 해보자..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붙이자마자 히트 시키지도 못했어요.. 재밌는 것은 비텐베르크는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면죄부를 더 사고싶어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사건이 발생이 됩니다.. 같은 해 12월에 독일어로 번역된 95개조 논제가 독일 전 지역에서 출판되게 되는 것이지요.. 작센의 중심지인 라이프치히.. 독일 남부의 중심지인 뉘른베르크와 스위스의 중심지인 바젤에서 루터의 이 독일어 번역본이 엄청나게 팔리는데요..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성공 유치가 이제는 정치적인 색깔 까지로 변모하게 됩니다.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레오 10세에게 보고하게 되죠.. 난리 났다고.. 이것 때문에 루터라는 이상한 놈의 글 때문에 면죄부가 잘 팔리지 않는다고.. 난리 났다고 레오 10세에게 고발하니 레오 10세는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가 진짜로 면죄부 판매권이 줄어드니까 두 명의 수(도?)사를 정리하도록 명령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그 두 명의 수도사를 다루기 전에 재미있는 것은, 이 루터를 스타로 만든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가 에라스무스 편에 다뤘던 바젤의 출판업자 프로벤입니다. 이 프로벤은 당시의 지적 재산권이 없었던 시절이고 에라스무스처럼 르네상스 기질이 확고한, 조금 배운 자가 아니라 변방의 루터라는 당대의 문화를 잘 몰랐던 사람이.. 이탈리아 문화를 잘 몰랐던, 출판업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을 히트를 시킴으로써 엄청난 돈을 벌게 되지요.. 루터의 책을 남발하게 출판하고 프로벤은 부를 축적하구요.. 그 부를 루터에게 한푼도 주지 않습니다. 불쌍한 독일인이지요.. 이게 순진한 독일인이 광신도가 되는 수순이기도 합니다. 풍요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것도 쉽지요.. 풍요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내 요구조건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면죄부 판매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95개조 반박문 중에 해당되는 사항은 50조에 쓰여져 있습니다. 이 50조는 면죄부가 판매되는 것을 거의 중단하게 만드는 가장 큰 논제였지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만일 면죄부 설계자들이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지 교황이 그 내용을 알고있다면 베드로 성당을 세우지 말고 차라리 그것을 불로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편이 낫다.. 그 성당은 지금 자기 양들의 살과 가죽과 뼈를 긁어 건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제는 실제로 실화가 되지요.. 로마는 1527년 불에 타는데.. 사코디 로마.. 네로의 화재 때보다 더 큰 규모의 재난이었습니다.. 참고로 네로는 그 대화재 때문에 탄핵당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지요? 이 루터의 예언은 마치 진짜 예언처럼 들어맞아 버렸고, 희생양은 독일인들이 아니라 이탈리아인들이었습니다. 급급히 1518년 1월 20일 면죄부의 설교자였던 텟첼과 프랑크푸르트 대학 총장 콘라드 빔피나Konrad Wimpina를 파견해 루터의 글을 반박하는 95(96개를 썼으니?) 106개 조항을 만들어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면죄부 판매는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에 힘을 받은 루터는 95개조 논제 해설을 작성해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전달하고, 95개조 논제를 독일어로 요약해서 설교합니다. 찌라시를 배포한 것이지요.. 여론전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단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이 여론전에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형국이었지요.. 그러나 당시의 작센지방은.. 지금도 잘 사는 그 작센..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대표적 도시를 갖고 있는 이 작센 지방은 루터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센 지방에는 예나 지금이나 카톨릭보다는 신흥 부르주아 세력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해적 출판의 원조가 맑스가 아니라 루터였던 사실은 저도 하나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되는데 이 운동은 10년도 안돼서 금새 부패하게 됩니다. 10년도 안된 시간 후에 개혁자들, 그러니까 예전에 신부가 하던 일을 했던 목회자들, 목사들.. 혹은 예전에 성당 일을 했었던 일을 대신하게 된 교회들.. 이 교회들이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10년도 안돼서.. 그래서 저는 이 진보세력들이 내용이 없이 집권했을 때.. 10년 후에 어떻게 될지.. 그 뻑뻑한 소리가 이미 들려온다는 생각도 합니다. 조심해야 되는 것이지요.. 내용이 있는 인간을 우리는 지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개신교 진영 내에서는 밑도 끝도 없는 반동(?반종?)과 무식함이 난무했다고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에 써있습니다.. 반지성주의가 파괴본능과 만난 것이지요.. 오해된 복음의 자유는 율법기능을 철폐시키고 권위와 질서는 무시당하며, 도저히 성직자라 할 수 없을만큼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의 상처가 넘쳐났고, 자연은 양식 파괴로 이어지고, 그런 와중에 사코디 로마가 일어나고.. 사태가 너무 심각해지자.. 바이마르..의 영주 요한 프리드리히가.. 루터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편지를 씁니다.. 교회의 부적격자들이 너무 많아서 암행어사로 활동해서 해임시켜달라는 청이었지요.. 1529년에 친구 게오르그 슈팔라틴에게 루터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심각성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농민들은 목회자에게 아무것도 배운 게 없으니 당연히 아는 것이 없고.. 게다가 자신들이 선물로 받은 자유를 함부로 남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신앙 없는 사람처럼 기도도 하지 않고 죄의 고백인 참회도 하지 않고.. 성찬에 참례하지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일반 신자들이 과거에 교황을 우습게 여겼지만, 이제는 우리 목사를 우습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열린 교육이 생각났습니다. 교육 개혁을 한다고 해서 교육 파괴를 했던 한 사례가 저는 열린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그 피해가 지금 20~30대의 몸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20~30대가 진보적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교육 방법에서 이런 앞모를 방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유가 엄청난 고도화된 지식과 만나지 않으면 이것은 썩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요.. 그 썩은 자유는 방치로 이어지고 방치된 교육은 인간을 보수화시키게 마련이지요.. 때문에 젊은데도 보수주의자가 되는 이런 기질들은 사실은 열린교육의 피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열린 교육을 따라 한 것은 미국인데.. 미국의 젊은이들이 보수화되는 경향도 그 교육을 함부로 열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 역사는 이미.. 종교개혁이 있었던 16세기 초반에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지요.. 정념이 욱하는 것입니다.. 마치 권위가 망친 것처럼.. 권위에는 죄가 없고, 권위는 가치가 아니지요.. 선악의 판단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피해를 보면서 이 진보가 갖고 있던 하나의 결들을 하나하나씩 붕괴 시키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곧추세워야 하겠지요.. 루터는 대안을 생각하는데.. 그 대안이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루터는 그 교육을 통해서 자신이 실패한 종교 개혁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지요.. 루터가 생각한 그 교육적 목표는 보편교육입니다.. 우리가 했던 그 보편 교육이 여기서 나온 것이지요.. 모두가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 그래서 그 보편교육이 북유럽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베낀 것이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지역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지금은 오늘날에도 가톨릭 지역은 의무 교육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정당한 차별성을 둡니다.. 경쟁으로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질로 두지요.. 몸의 인간에게는 몸의 직업을.. 정신의 인간에게는 정신의 직업을 두고요.. 단 보상은 평등합니다.. 대학 교수의 보상이나 엔지니어의 보상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한 가지 다른 것 이라면 사람들이 대학 교수는 권위 있게 봐주고, 사람들이 엔지니어는 권위 없게 봐준다는.. 그 단 한가지 명분 뿐이 없습니다.. 돈은 오히려 지식인들이 더 못 벌죠.. 루터는 여러 장학제도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지요.. 이 학교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다음에 다룰 그 유명한 과학자 케플러 입니다.. 루터가 만든 이 보편교육 장학시스템의 수혜자가 케플러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천문학은 루터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루터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모두가 언어를 장착해야 한다고.. 루터는 또 이렇게도 말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성서로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신성을 가져야 한다고.. 정확하게는 나는 자신의 언어로 된 성서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고 씁니다.. 자신의 언어로 갖고 있는 성서입니다.. 남의 언어로 빌려쓴 성서가 아니라.. 남의 언어로 빌려 쓴 성서는.. 망각도 쉽거니와.. 매일 들어오는 이 정념이라는 엄청난 적과 맞서 싸울 수 없게 하지요.. 수도사들도 흔들릴까봐 하루에 여섯 번씩 기도회를 드리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흔들림이 없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수도원은 자극이 없는데도.. 그런데.. 우리는 엄청난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데도.. 한 두번 집중하면 될 것 같은.. 그 조급성을 부린다면 우리의 방법이 틀린 것이겠지요.. 루터는 엄청난 글을 씁니다.. 8만쪽 분량의 글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글을 통한 계몽만이 답이라고 보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루터의 그 어려운 글보다 쉬운 말을 더 선호했고, 루터의 노력은 더 격정적이고 더 단순한 종교개혁가들에게 돌아갑니다.. 루터교보다 칼뱅교가 으뜸에 섰고, 개혁은 난봉꾼들의 자극을 통한 봉기의 형식으로 출현하고, 그 봉기의 형식으로 출현한 그런 개혁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지지요.. 30년전쟁..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48혁명.. 이런 것들로 꾸준히.. 19세기까지.. 아니..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싸우면서 얻어진 평화가 지금의 유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00년 정도의 이 전쟁같은 삶은.. 삶 속에서 그들이 이룩했던 문화와 예술과 철학은 엄청난 높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루터는 작센 지방의 보호를 통해서 딸도 낳고 아들도 낳고, 종교에도 참여하고, 강의도 하면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다가 1546년 63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종교개혁의 성지인 비텐베르크 선교회에 안장되어 있지요.. 루터가 죽고 난 다음에 종교개혁은 더 난폭해졌고, 비텐베르크는 카를 5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결론 가겠습니다.. 똥팔이가 없으니까 힘드네요.. 권위에 대한 믿음.. 믿음에 관한 권위.. 하강하는 사회는 권위에 대한 믿음이 있지요.. 권위를 믿고 싶어 합니다.. 높은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릴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상승하는 사회는 믿음에 관한 권위가 강력합니다.. 믿는 것이지요.. 권위를 갖기 위해서 믿고, 믿음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이 믿음의 실력이 권위를 만든다고 할 수 있는 사회가 상승하는 사회의 특징입니다.. 권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믿는 것이지요.. 실력 좋은 믿음을 권위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순종 또한 이 사회의 특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게 제대로된 권위인지 망가진 권위인지 알아보는 눈이고.. 그 눈을 키우는 것이 바로 예술과 철학이라는 무기이지요.. 우리는 이 권위가 정당한 것인지.. 정당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합법적인 것인지 불법적인 것인지, 중요한 것인지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부터 해야 됩니다.. 이 구분이 안되면 모든 권위는 죄악이다! 라고 판결하고는.. 우리는 반동의 노예 정신으로 세상을 뒤엎고, 오랫동안 이룩해놓은 업적의 역사까지도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겠지요.. 그 사례가 사코디 로마이고.. 그 사코디 로마를 통해서 다시 부흥시키려고 했던 클리멘스 7세의 노력은 안타깝겠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면서 끝이 납니다. 다행인 것은 그 불타는 유적 안에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없었다는 사실인 것이지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굴러가는 바퀴입니다.. 자발적으로 굴러가는 바퀴로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밝아지는 태양이기도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스스로 밝아지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웃습니다.. 밝고 맑게 흘러가는 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우리의 삶의 기초였습니다.. 기단이었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발적으로 굴러가기보다 타율적으로 굴러가고.. 스스로 밝아지기보다 남을 통해 밝아지는 것을 옆에서 간편하게 누리기를 원합니다.. 거인이 되기보다 거인 위에 올라탄 안경쓴 난장이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밝고 맑게 흘러가는 그 멈춤 없는 물이 아니라.. 고이고 썩은 물의 양이 될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체제의 술수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의 실력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밝아지지 않으니 타자를, 타인을 모른체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밝아질 수 있는 사람만이 기운이 남아 타자를 품을 수 있다는 것.. 스스로 밝을 수 있을려고 하는 그런 열정이.. 우리의 당초의 존재의 모습이었다는 것.. 이것이 종교개혁이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방해꾼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척도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남이 해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모든 개혁은 자신의 언어로 하는 것이지, 타인의 언어로 같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실력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도 공부가 필요하고 자발적으로 굴러가는 바퀴가 되기 위해서라도 공부가 필요합니다. 재차 정리하지만 르네상스 정신을 배워야지.. 종교개혁의 그 반동을 배운다면 우리는 광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광신자적인 흥분 상태.. 쉽게 정념에 빠지는 그 상태로는 어떤 앞날도 좋은 앞날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잊지 않을 수 있겠고, 그 기억을 지속하려면 수도회에서 여섯 번의 참회를 거치듯 우리는 6번의 공부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도 놓치지 않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축복하고 긴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긴장하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긴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밝은 에너지의 한 주가 되기를 빌고, 똥팔이의 쾌차를 빕니다. -끝-